트럼프 광풍에 실리콘밸리도 ‘외면’ 짐싸는 한국 유학생들…

서울경제

연구비 삭감 ‘지원제도’ 올스톱
킹달러에 생활고도···탈출 러시

최근 미국 뉴저지주의 한 주립대학교 연구실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박사 과정 1년 차 A 씨는 며칠 전 돌연 채용 취소를 통보받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정식 업무에 앞서 연구실에 이미 9주간 출근까지 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모든 펀딩 절차가 동결(freezing)돼 인력을 받을 수 없다’는 통지가 왔기 때문이다. A 씨는 “유학생들은 대부분 미국 정부의 연구 지원금 등 펀딩에 의존하는데 그 경로가 아예 막혀서 월급을 줄 수 없다는 것”이라며 “다른 연구실 지원을 알아보는 중이나 최악의 경우 귀국해야 할 수도 있다”고 절망감을 토로했다.

미국 내 한인 유학생들에게 ‘트럼프발 반(反)이민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14일 서울경제신문이 미국 전역의 석·박사생과 학부생, 국내 유학 준비생 및 유학원 관계자 등 20여 명과 진행한 인터뷰를 종합하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의 외국인 유학생 대상 각종 장학금·채용 지원 제도가 줄줄이 올스톱되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강력한 반이민 정책과 동시에 대대적인 연구 예산 삭감에 나섰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에 필수적인 연구비·생활비 지원이 대폭 줄어든 것은 물론 현지 빅테크에서 일하려는 석사들의 취업 문턱까지 높아지며 유학 간 한국 학생들의 설 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 혐오 정서 악화, ‘킹달러’발 생활비 부담까지 겹치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이어 또다시 유학생들의 미국 탈출 러시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 美취업 1차 서류부터 줄줄이 탈락…학생비자 합격률 70%로 뚝

다양성 앞세웠던 DEI정책 폐지

돌연 지원금 끊긴 석박사 ‘패닉’

부담커진 기업도 외국인 꺼려

정착비까지 뛰자 韓복귀 잇따라

미국 워싱턴대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김 모(28) 씨는 “취직이 어려워졌음을 크게 체감한다”면서 “주변 박사 지인들 중에 연구비가 잘리거나 6년짜리 풀펀딩 대신 3~4년밖에 펀딩을 못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간 경우가 여럿”이라고 전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석사생 이 모(27) 씨도 지난해 9월부터 구직 중이지만 서류부터 탈락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 씨는 자신이 자꾸 떨어지는 이유로 ‘비자 스폰서십’을 지목했다. 비자 스폰서십은 미국 기업이 외국인을 채용할 때 노동부 및 이민국에 비자 신청서를 제출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할 때마다 꼭 ‘비자 스폰서십이 필요하냐’고 묻는데 맞다(yes)고 하면 감점이 되는 듯하다”며 “한번은 필요하다고 체크하자마자 곧바로 ‘최소 기준 충족이 안 된다’며 탈락했다”고 전했다.

그간 한국의 우수한 기술 인재들을 데려가려던 빅테크 기업들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이 씨는 “정치적으로 불확실하다 보니 실리콘밸리마저 비자 지원 규모를 줄이는 것 같다”며 초조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유학생이 졸업 후 취업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허가증(EAD) 카드 발급 절차도 늦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지의 학부생들 역시 외국인에 대한 채용문이 좁아졌음을 체감한다. 애리조나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지원(21) 씨는 “매년 학교에서 열리는 직업박람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면서 “재작년까지만 해도 국제 학생들을 지원해주고 뽑는 기업이 많았지만 올해 행사에서는 대부분 선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민권이 있는 친구들이 서류를 낸 9곳 중 절반 이상으로부터 합격한 반면 나는 딱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다”고 덧붙였다.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지를 흔들고 있는 제도적 변화는 크게 세 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 폐지다. DEI 폐지에 실리콘밸리 빅테크들까지 호응하며 유학생들의 입지 문제가 커지고 있다. 메타는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나서서 DEI 정책 폐지에 나섰다. 구글과 아마존도 DEI 정책을 재검토하며 축소·폐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미국국립보건원(NIH), 국립과학재단(NSF)을 필두로 한 주요 연구기관들의 예산 삭감, 급변하는 이민·비자 관련 정책도 유학생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예술·과학계를 중심으로 각종 연구 사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뚝 끊긴 것은 물론 연쇄적으로 민간 기업의 소수자(외국인·여성 등) 대상 장학금 및 채용 지원 제도가 쪼그라들고 있다.

국내 유학원 업계에서도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취재진이 찾은 서울 소재 유학원 5곳은 입을 모아 “고환율과 비자 문제로 유학 상담 문의가 눈에 띄게 줄었음을 체감한다”고 전했다. 목동의 한 유학원 원장 B 씨는 “코로나19 시기보다 유학 수요가 더 줄었다. 트럼프 리스크가 있는 데다 정착·수업비가 만만찮으니 일부 학생들은 다른 영어권 국가를 대안으로 찾는 추세”라고 밝혔고 강남 소재 유학원 원장 C 씨는 “예전이었으면 충분히 붙었을 사람도 학생 비자를 거절당하는 경우가 지난해 말부터 많아졌다”고 말했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혐오 정서가 확산하며 느끼는 심리적 압박, 치솟은 환율 부담으로 유학생들의 ‘미국 탈출’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코로나19 이전에 5만 명을 훌쩍 넘겼던 한국 유학생 수는 2020~2021년 3만 9491명까지 줄어들었다가 지난해 4만 3149명까지 회복한 상태다. 기술 패권을 두고 각국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뿐 아니라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가운데 급성장하는 기술 산업을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 유학생이 줄어들게 되면 한국의 경쟁력도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DEI 정책=다양성(Diversity)·형평성(Equity)·포용성(Inclusion)의 약자로, 인종·성 등의 소수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부여해 포용적인 환경을 갖춰가자는 정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취임 후 바이든 정부의 DEI 정책을 종료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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