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그곳엔 아직 ’89 식구들’이 산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재개발구역의 공가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철거가 시작된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에 저녁 어스름이 깔린다. 15년간 표류했던 재개발 사업으로 황폐화된 마을의 무너진 담벼락과 외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붕괴 위험’, 공가를 뜻하는 ‘O’ 표시가 가득하다. 하루종일 철거 소음만 가득했던 인적 없는 마을에 가로등 불이 하나둘 켜질 무렵,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불빛이 하나둘 새어 나온다. 간간이 문이 열리고, 말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이곳엔 10여 명의 주민이 살아간다.

14일 백사마을 1통에 위치한 이수미(가명·50)씨 아버지 명의의 건축물. 이씨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이곳에 독립 전까지 약 20년 살았다. 노란 기둥에는 아버지의 국립유공자 표식이 붙어있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1통에 위치한 이수미(가명·50)씨 아버지 명의의 건축물. 이씨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이곳에 독립 전까지 약 20년 살았다. 노란 기둥에는 아버지의 국립유공자 표식이 붙어있다. 최주연 기자

백사마을은 1967년 서울 도심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중계동 산 104번지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이 옮겨오면서 처음 형성됐다. 철거민들이 정부가 배급한 천막을 네 가구가 나눠 쓰기 시작해, 이후 싼 집값을 찾아 들어온 이주민들까지 합해 백사마을의 주거인원은 한때 1,200명에 달했다. 도심에서 밀려난 이들의 보금자리가 된 백사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가난하지만 정있는 마을의 상징이 됐다.

“백사는 애증이에요. 엄마 고생시켜서 미웠고, 이제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되니 또 미워요.”

백사마을 사람들에게 어려웠던 그 시절의 기억은 생생하다. 이수미(가명·50)씨는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처참히 무너진 집 앞에서 망치를 들고 웃던 그 얼굴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김미정(가명·60)씨는 좁은 땅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고 고무대야로 흙을 퍼서 개천으로 날랐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생각나 눈물을 삼켰다.

21일 '백사마을' 8통에서 75년도부터 니트공장을 운영 중인 박귀순씨가 과거 1통 새마을운동추진위원회 출범 당시 사진을 보고 있다. 최주연 기자

21일 ‘백사마을’ 8통에서 75년도부터 니트공장을 운영 중인 박귀순씨가 과거 1통 새마을운동추진위원회 출범 당시 사진을 보고 있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김수민(가명)씨가 본인의 집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1967년도부터 백사마을에 거주한 김씨는 1995년부터 이곳에서 살며 두 아이를 키웠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김수민(가명)씨가 본인의 집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1967년도부터 백사마을에 거주한 김씨는 1995년부터 이곳에서 살며 두 아이를 키웠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김수민(가명)씨가 이웃들에게 열무국수를 대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김수민(가명)씨가 이웃들에게 열무국수를 대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너도나도 없던 시절이 남긴 선물은 서로 의지하는 습관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1통의 김수민(가명·65)씨는 8통의 니트공장 주인 박귀순(73) 부부를 불러다가 열무국수를 대접했다. 주민들은 자식보다 더 자주 얼굴을 보던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고 말한다. 가죽 금속 판형 공장을 운영하는 정재근(63)씨는 “평생 이렇게 교류하고 살았는데, 아파트 못 살겠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남은 주민들은 서로를 ‘89 식구들’이라 부른다. 입주권 대상에서 제외된 1983~1989년 사이에 지어진 무허가 건축물 소유자들이 서로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호칭이다. 서울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조례는 1989년 1월 23일까지 지어진 무허가건축물을 입주권 보상 대상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백사마을 주민대표회의는 1982년 4월 8일 이전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로 보상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건축물 대장에 등록하지 않은 채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해당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 실제로 거주했는지를 항공사진, 재산세 납부 내역 등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1982년 4월 8일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이주비 대출·입주권 모두 제한되며 손실보상만 받을 수 있다. 현재 SH에 따르면 미등록 무허가 건물은 174개다. 이수미(가명)씨는 “증명 못하면 입주권, 이주비도 못 받고 쫓겨나듯 나가는 거죠”라며 한숨 쉬었다.

14일 '백사마을'에서 우물터가 남아있다. 백사마을 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우물이나 근처 절에서 물을 길어다 식수 및 생활수로 사용했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에서 우물터가 남아있다. 백사마을 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우물이나 근처 절에서 물을 길어다 식수 및 생활수로 사용했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8통 지역에서 34년째 금속 엠보싱 공장을 운영하는 정재근(67)씨는 본인의 금속 엠보싱 공장에서 출구 쪽을 보며 서 있다. 정씨에 따르면 공장이전비용은 약 5000만 원에 달한다. 최주연 기자

14일 ‘백사마을’ 8통 지역에서 34년째 금속 엠보싱 공장을 운영하는 정재근(67)씨는 본인의 금속 엠보싱 공장에서 출구 쪽을 보며 서 있다. 정씨에 따르면 공장이전비용은 약 5000만 원에 달한다. 최주연 기자

오는 11월 예정된 백사마을 착공으로 서울시가 지정한 미래유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며 개발이 확정된 백사마을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경관, 구릉지, 마을 공동체 등을 고려한 주거지보전사업까지 계획됐으나 무산된 뒤 3,178세대 26개 동, 지하 4 ~지상 35층 규모의 대단지로 태어난다.

11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박귀순(75)씨 니트공장 부부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서있다. 최주연 기자

11일 ‘백사마을’ 1통에 거주하는 박귀순(75)씨 니트공장 부부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서있다. 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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