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반인권 범죄 실형’ 후지모리 前페루 대통령 사망

2000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하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향년 86세…집권 10년 영욕, 25년형 복역 중 건강 문제로 작년말 사면·출소

페루 검찰 “최소 25명 사망 사건에 관여”…각종 비위 혐의로 추가 조사

일본계 이민자 가정 출신…2000년 일본 도피 후 ‘대통령 사임서’ 팩스 제출 논란

반인륜적 범죄로 실형을 받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수도 리마 사저에서 사망했다고 페루 일간 엘코메르시오와 AP·AFP통신 등이 유족의 말을 인용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향년 86세.

그의 네 자녀 중 맏딸이자 페루 야당(민중권력당·FP) 대표인 케이코 후지모리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제 아버지가 오랜 암 투병 끝에 소천했다”며 “아버지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함께 기도해 달라”고 적었다.

1990∼2000년 페루 국정을 이끈 그는 인플레이션 완화와 강력한 치안 정책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잔혹한 반(反) 인권범죄와 비위 행위로 지탄을 받으며 쫓기듯 권좌에서 물러났다.

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한 그는 2026년 대선 출마 의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1996년 2월 4일 촬영.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1996년 2월 4일 촬영.[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일본계 이민자 가정 출신…집권 10년 영욕 점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1938년 7월 일본계 이민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중국인’이라는 뜻의 ‘엘 치노’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수학과 교수와 라몰리나 농업대학 총장을 지냈다. 1990년 유명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초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국영 산업 민영화를 통한 경제 안정화 추진과 당시 악명 높던 게릴라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축출을 위한 일련의 과감한 치안 정책으로 지지를 받았다. ‘빛나는 길’은 마오주의(마오쩌둥 사상)를 기치로 내건 반체제 반군이다.

그러나 1992년 4월 군대의 지원을 받아 ‘셀프 쿠데타’를 일으킨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권위주의적 행보도 보였다. 1993년엔 개헌까지 주도했는데, 의회의 대통령 탄핵 발의를 광범위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조문을 담은 이 헌법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1995년 대선에서 2위 후보를 40% 넘는 득표율 차로 따돌리며 재선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2000년 3선 연임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2000년 대선 직후, 재임 중 페루에서 자행된 각종 학살·납치 등 각종 범죄와 국고 횡령 등 비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명예스럽게 권좌에서 물러났다.

후지모리는 이때 일본으로 도피한 상태에서 팩스로 사임서를 제출했다는 논란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015년 법정에서의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2015년 법정에서의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재기 꿈꾸며 귀국했다가 실형…고령에 투병하다 사면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2005년 정치적 재기를 위해 칠레로 입국했다가 가택 연금됐고, 2007년 페루로 범죄인 인도된 뒤 2009년 징역 25년 형을 받았다. 이 형량은 이듬해인 2010년 페루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 범죄와 관련한 사망자는 최소 25명이라고 페루 검찰은 적시했다.

그로부터 7년여 뒤인 2017년 12월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당시 대통령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

이는 탄핵 위기에 몰렸던 쿠친스키 전 대통령의 자진 사임으로 이어지는 ‘탄핵 반대표 매수 파문’을 낳기도 했다. 쿠친스키 전 대통령이 민중권력당과 ‘후지모리를 사면하는 대신 자신의 탄핵 반대표를 받아내는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페루 법원은 이후 2018년 10월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취소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다시 2022년 3월 사면 결정을 되살리라고 결정했다.

페루 당국은 미주기구(OAS) 산하 미주인권재판소 판결에 근거해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고령에 병까지 얻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비롯한 법정 투쟁 끝에 결국 지난해 12월 출소했다.

현지 매체들은 그가 호흡기·신경계 질환에 더해 설암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TV페루는 후지모리가 지난 6월 낙상으로 고관절 수술을 받은 이후 건강이 악화한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 원주민 강제 불임·정적 사찰…수사할수록 범죄 혐의 ‘추가’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스페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약 27만명의 여성 원주민을 상대로 가족계획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불임 수술을 자행한 것으로도 추가 조사를 받았다. 집권 기간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정적’을 불법으로 사찰한 혐의도 받았다.

올해 초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잘 알려진 전 국가정보국 수장이 반군 학살 및 고문과 관련한 자신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는데, 후지모리는 관련 부인했다고 페루 안디나통신은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또 다른 피고인인 전 육군참모총장 등과 함께 법정 다툼을 계속할 전망이라고 현지 매체들은 전한 바 있다.

AP는 “케이코 대표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2026년에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계획이 있었다고 언급한 적 있다”며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지난 4일 휠체어를 타고 개인 병원을 떠나는 게 마지막 공개 활동이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준비 여부’를 묻는 취재진에 “두고 봅시다”라고 답했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 사망 소식에 사저 찾은 지지자
후지모리 전 대통령 사망 소식에 사저 찾은 지지자(리마 로이터=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 지지자가 후지모리 전 대통령 사저 앞에 도착해 있다. 202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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