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먹어 생기는 서증(暑症)은 흔한 여름질환이었다.
‘동의보감’은 서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몸에서 열이 나고 저절로 땀이 흐르며 입이 마르고, 복통으로 곽란이 있으나 몸이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서증 환자에게 양생 지침도 덧붙인다. “여름은 사람의 정신을 소모하는 시기다. 심장의 기운(心火)은 왕성하고 신장의 기운(腎水)는 약해져 있다. 그러므로 성생활을 적게 하고 정기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 또 다른 문장도 있다. “여름 더위는 기(氣)를 상하게 하기에, 지나치게 술을 마시거나 성생활을 하면 신(腎)이 상하여 죽을 수 있다.” 한마디로 주색잡기를 멀리하고 심신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
일사병은 강한 태양과 고온다습한 환경 때문에 체온 조절이 제대로 되지 못해 생기는 질환이다. 심하면 체온이 37~40℃까지 치솟는다. 초기에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다가 두통, 구토, 어지러움으로 이어진다. 정신 혼미해져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경우도 있다. 특히 노약자의 경우 자칫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위를 피하고자 에어컨, 냉장고, 아이스크림, 차가운 음료 등을 가까이 하지만, 냉방병이나 복통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얼음과 냉수는 마시는 순간엔 시원하지만,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면역 균형을 깨는 원인이 된다. 아직 면역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어린이는 더욱 취약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온도 변화에 민감한 만성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의사학연구소 초대 소장이자 ‘질명이 문명을 만든다’의 저자인 헨리 지커리스트는 “사회와 문명이 질병을 만든다. 그리고 질병은 다시 인간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더위를 이기려고 만든 문명의 이기가 냉방병이라는 새로운 질환을 낳은 오늘의 현실은 이 말의 맞춤 사례다.
찌는 듯한 여름 더위를 이기고자 오랫동안 쌓아온 선조의 지혜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용한 건강 전략이 될 수 있다. 보리밥은 대표적인 여름 건강식이다. 조선 영조의 장수 비결 가운데 하나로도 꼽힌다. 왕이 보리밥을 먹었다는 게 다소 의외지만, 실록 기록상으로는 영조가 유일하게 보리밥을 먹었다. 특히 여름철에 섭취 기록이 집중돼 있다.
보리는 음(陰)의 성질을 가진 곡식으로, 성질이 서늘하고 찰지다. 날씨가 더워지면 인체의 내부가 달아오르는데, 식욕이 떨어지는 것도 위장에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이럴 때 찬 성질을 가진 보리밥은 몸을 서늘하게 식혀 입맛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영양학적으로도 보리는 시금치와 비교해 칼슘이 11배, 마그네슘이 3배, 칼륨이 18배나 풍부하다.
보리는 발아시키면 약성이 달라진다. 엿기름이라 불리는 맥아(麥芽)는 최고의 천연 소화제다. 맥아를 발효시켜 만든 식혜가 잔칫상에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 배고픈 시절, 갑작스러운 과식으로 고장날까봐 위의 소화력을 돕고자 한 선조의 지혜다. 맥아는 음식뿐 아니라 젖을 삭이는 작용도 뛰어나다. 중국 청나라 의학서 ‘의종금감(醫宗金鑑)’에는 맥아를 “산후에 젖이 뭉치고 열이 나는데 사용한다”면서 젖이 끊겼을 때 처방했다. 실제로 맥아 40g 정도 달여 마시거나 분말로 복용하면 젖을 뭉쳐서 가슴이 부은 상태를 해소하는 데에 좋다.
영조는 미숫가루도 즐겼다. 보리가 핵심 재료인 미숫가루에 복분자, 오디, 하수오 분말을 더한 강릉 어유룡가의 비전 처방을 추가했다. 복분자는 최근, 장내세균을 억제해 설사를 막는 효능이 밝혀져 여름철에 더욱 제격이다. 하수오는 본래 이름이 야교등(夜交藤)으로, 밤이 되면 줄기가 엉켜 예로부터 음·양을 동시에 채워주는 장수 명약으로 여겨졌다. 오디는 뽕의 열매로, 자양 강장에 좋아 갈증을 없애고 음기를 북돋아 진액을 채워준다.
영조는 말년에 밤과 연밥을 넣은 담백한 식단을 선호했다. 밤은 삶으면 잘 체하기에 자루에 담아 바람에 말려 먹었다. 이렇게 하면, 하초(下焦)를 보하여 다리에 힘이 생기고 바르게 서는 효능이 있다. 연밥은 연꽃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고 건망증을 줄이는 효험이 크다. 노화에 맞춰 먹을거리를 달리 처방한 것이다.
‘제호탕’은 단오 때 임금에게 진상했던 여름 청량음료다. 소젖으로 만든 ‘제호’나 ‘제호고’와는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 제호탕에는 제호가 들어가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제호탕은 여름 갈증 해소에 쓰인 처방으로, ‘오매’ ‘백단향’ ‘사인’ ‘초과’ 등 4가지 약재로 구성된다.
이중 덜 익은 매실을 훈증한 오매(烏梅)가 핵심이다. 아직 익지 않아 독성이 있는 푸른 매실을 불에 구워 말린 것이다. 매실에는 구연산이 풍부해 식중독 예방과 찬 음식으로 인한 배탈에 처방하던 약재였다. 구연산은 실제 해독과 강한 살균 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선 오매를 가슴이 답답하며 화가 올라오는 증상을 안정시켜 심장을 보호하는 데에 썼다.
제호탕에 들어가는 또 다른 약재는 ‘백단향’이다. 박달나무와 닮은 단향나무과의 식물로, 배탈 치료에 널리 쓰였다. 위장 활동을 돕고, 찬 음료나 한기가 맺혀 명치가 아픈 곽란, 토사, 복통 증상을 치료한다. 그 외에 ‘사인’이란 약재는 생강과 식물로, 맵고 따뜻해 위장을 데워주며 여름철 떨어진 입맛을 되찾는 데 효험이 있다. ‘초과’ 또한 생강과의 따뜻한 식물인데, 헛배 증상과 냉기를 없애고 과일이나 술을 많이 먹고 생긴 복통을 치료하는 데 썼다.
이처럼 제호탕의 네 가지 약재를 살펴보면, 영조가 이 음료를 택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찬 과일이나 음료로 인한 설사병이나 식욕 부진 등 여름철 위장 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인 약식(藥食)이었던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겉차속따(겉은 차갑고 속은 따뜻한)’의 진정한 군자의 여름 음료라 할 만하다.
더운 여름 대자리에 누워 죽부인을 품에 안고 잠을 청하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부럽지 않다. 대나무는 맛이 쓰고 찬 기운을 지닌다. 여름철, 대자리를 펴고 누우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선조들이 대나무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공기가 통하는 선반에 걸어둔 것도 밥이 쉽게 쉬지 않게 하기 위한 지혜였다.
매난국죽에서 겨울을 상징하는 대나무는 식재료나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껍질(죽여·竹茹)은 심장의 열을 내려주고, 즙(죽력·竹瀝)은 중풍으로 인한 열증을 다스리며, 잎(죽엽·竹葉)은 지나친 걱정으로 인한 불면에 효과가 있다.
닭과 인삼을 함께 넣은 삼계탕은 복날의 대표적인 보양식이지만, 사실 약에 가까운 음식이다. 약과 음식은 그 근원이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더구나 예부터 우리 인삼과 닭은 최고의 약재로 꼽혔다. 중국 최고의 약물학서 ‘본초강목’에는 닭을 약용으로 언급하면서 “약으로 쓸 닭은 조선의 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한의학은 이미 생긴 병보다, 아직 오지 않은 질환을 예방하는데 더 큰 가치를 둔다. ‘황제내경’에 “혹서기가 다가오면 체력 고갈을 대비해 미리 더위 예방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매번 등장한 처방이 청서익기탕(淸暑益氣湯)이다. 준비성이 남달랐던 영조는 여름이 오기 전부터 미리 복용한 처방이다. 또 조선 왕들도 스물아홉 번이나 처방받았다.
이상곤 한의학 박사ㆍ전 대구한의대 교수












































































